"생명과학에 대한 기대 현실로 이어지려면"

줄기세포· 맞춤의학· 예측의학· 이종장기·나노기술·U-Health 등등.

이런 단어들은 이제 일반인들에게도 더 이상 생소하지도 않으며 건강한 노후에 대한 기대감을 안겨주고 있다. 더욱이 정부가 생명과학(BT) 분야를 우리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핵심산업의 하나로 육성하려는 의지는 생명과학 분야의 일원으로서 더없이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생명과학에 대한 기대가 꿈이 아닌 현실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해결되어야 할 문제들이 있다.

첫째 부처간 벽이 허물어져야한다. 지금 우리나라 연구비는 과거와 달리 결코 적다고 할 수 없고 또한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R&D 예산은 연간 약 10조원에 달하며 이는 GDP 대비 3.47%로 세계 2위이고 향후 2012년 까지 5%로 높이겠다는 정부 발표도 있었다. 생명과학(BT) 관련 연구비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교육과학기술부만 보더라도 올해 BT분야에만 4천억원이 넘는 예산이 책정되었으며 이는 작년대비 14%나 증가한 금액이다.

이제는 연구비가 없어서 연구를 못한다는 불평은 하기 어렵게 되었다. 현재 BT 연구에는 교육과학기술부가 가장 많이 참여하고 있으며 보건복지가족부, 지식경제부, 환경부, 농수산부 등 정부 여러 부처가 연구의 성격에 따라 각기 다른 단계에서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업무를 분담하다 보니 영역 간 경계가 모호한 경우가 많아 중복은 물론이고 부서 간 이해관계의 상충으로 인한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물론 오래된 관행이고 부처 간 고유 업무 영역이 있으니 경계의 벽을 허무는 것이 쉽지는 않겠으나 중복투자 방지·예산절감·그리고 연구의 효율성 향상을 위하여 정부의 과감한 대책이 필요해 보인다. 미국과 영국의 경우와 같이 보건의과학 연구를 총괄하는 하나의 독립기구를 설립하는 것도 대안이 될 것으로 보인다.

현 R&D 예산 연간 약 10조..BT연구 각 부처 분산돼 중복투자등 비효율 초래

둘째 BT 연구에는 임상의사(MD)와 생명공학 연구자들(PhD) 간의 긴밀한 협동이 필수적이다. 이는 모든 연구자들이 알고 있으나 실천이 쉽지 않다. BT 분야가 우리나라의 핵심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기획단계에서부터 소비자 중심의 접근이 필요하다. 과거 우리나라 BT연구는 연구자 중심, 즉 공급자 중심으로 투자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IT산업의 성공은 국내 소비자들이 큰 기여를 한 덕분이다.

반면에 BT산업의 일차소비자는 환자를 매일 접하는 임상의들로서 이들의 요구가 반영되지 못한 BT투자는 산업화로 이어지기 어렵다. 또한, 성공적인 BT 연구에는 완벽한 임상정보가 수반된 질 높은 시료가 가장 중요하며 이에는 많은 환자를 치료하는 임상의사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 다음으로는 시료를 이용한 실험과정과 분석이며, 마지막으로 연구결과를 해석하고 실용화 방안을 찾는 단계에는 모든 연구자가 참여하지만 특히 환자를 매일 접하고 고민하는 임상의사의 기여가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PhD 또는 MD 만으로 구성된 연구단이 독자적으로 훌륭한 BT 연구를 하는 것은 어렵다. 환자 접촉이 없고 연구에만 몰입하는 PhD 만으로 구성된 연구단은 임상정보와 시료를 확보하기 어렵다. 반면에 환자를 많이 보는 임상의사는 진료 부담 때문에 연구할 시간이 부족하고 그렇다고 환자진료를 줄이면 시료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모순이 있다.

또한 진료수입에 크게 의존하는 우리나라 대부분 병원에서 진료를 포기하고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는 임상의사는 거의 없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부분적으로라도 해결하려면 미국처럼 연구자의 인건비를 연구비에서 일부 지불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무엇보다도 의료진과 병원 경영진의 인식이 바뀌어야한다.

연구도 소비자 중심의 접근 필요..BT 산업의 일차 소비자는 임상의사, 이들의 참여가 필수

셋째, 임상연구에 좀 더 많은 투자가 이루어져야한다. BT 연구는 사람의 질병연구에서 시작하여 국민건강을 증진시킨다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진행되어야하며 IT 분야와 달리 사람대상 연구이므로 실용화를 조급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신약이나 신 의료기기를 개발하여 실용화하기 까지에는 체계적인 장기적 전략이 필요하며 이에는 엄청난 노력과 시간, 그리고 수천억 원에 이르는 비용이 든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는 사람을 대상으로 질병의 예방·조기발견·예후·치료방법·치료결과를 연구하는 임상연구 활성화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맞춤의학을 예로 들어보자. 즉 유전체 연구를 비롯한 기초연구결과를 실용화하려면 오랜 기간 축적된 임상정보가 필요한데 그 이유는 임상정보 없이는 실험결과와 질병의 표현형과의 연관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피 한 방울을 넣고 고가의 첨단 자동분석기계를 돌리면 논문 한 편은 나올지 모르지만 이런 결과는 논문을 위한 논문, 연구를 위한 연구로 끝날 위험이 있다.

실제 고혈압을 비롯한 각종 심혈관 질환 연구에 가장 기본 데이터를 제공해 온 Framingham 연구를 예로 들어보자. 지금부터 60여년 전 미국 Framingham이라는 지방의 주민을 대상으로 심혈관계통 질환에 대한 임상정보를 지속적으로 수집하여 분석해온 이 연구 자료는 현재의 첨단 기술을 이용한 연구결과를 분석하고 실용화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임상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심혈관질환 예방과 치료에 중요한 이정표가 된 많은 논문들의 근간이 되었고 실제로 환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이외에도 선진국에서 훌륭한 연구 성과들이 계속 나오는 것은 다양한 질병을 대상으로 잘 짜여진 계획에 따라 진행하는 임상연구가 이미 오래전부터 활성화 되어왔기 때문이다. 현재 환자 치료에 큰 영향을 미친, 자주 인용되는 대규모 임상연구의 대부분이 외국에서 이루어진 결과로써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한국인 특성에 맞는 근거중심 임상의학의 정립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와 같은 대규모 임상연구에는 물론 충분한 연구비와 높은 사명감을 가진 연구진이 필요하다.

그런데 현재 진정한 의미의 임상연구에 대한 투자는 연간 80억 원에도 미치지 못하며 이는 우리나라 BT 연구비 총액의 2%에 불과하다. 반면 미국의 경우 생명공학 연구를 총괄하는 국립보건원의 예산 중 무려 34%가 임상연구에 쓰이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첨단 BT 연구와 병행하여 임상연구에도 정부가 아낌없는 투자를 한다면 10년 후에는 BT 산업이 진정으로 우리의 미래를 책임지는 분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이다.

임상연구비 BT 연구비 총액의 2%불과..한국인 특성에 맞는 근거중심 임상의학 정립해야

넷째, 단기 결과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최근 보도된바와 같이 아시아 대학평가에서 생명과학과 의학부문에서 10위권 대학 중 우리나라에서는 서울대 하나만 포함되었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그 중 하나가 국제적인 '수퍼스타'가 없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었다. 사실 지금 우리나라 연구 환경에서는 스타급 연구자가 나오기 어려워 보인다. 가능성 있는 연구자를 일찍 발굴하여 집중 투자를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리고 일단 발굴한 연구자는 적어도 몇 년 간은 눈에 보이는 업적을 내는데 집착하지 않도록 배려하고 파격적인 지원을 해주어야한다. 앞으로 노벨상을 받을지도 모를 연구자를 잦은 회의참석이나 행정업무, 매해 되풀이되는 보고서 쓰는 일에 매달려서 소중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같이 매년 SCI 논문과 특허 숫자만 세어 연구자를 평가한다면 창의적인 훌륭한 연구 업적이 나오기 어렵다. 논문이나 특허를 급조해야하는 부담이 크면 비록 드문 경우이지만 연구윤리까지 어기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

우리나라는 임상분야에서 인적자원이나 병원시설·장비 등 인프라 측면에서 이미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한 분야가 아주 많다. 이와 같이 이미 구축된 임상 인프라를 이용하여 잘 설계된 임상연구와 BT 연구를 효율적으로 같이 시행해 나간다면 국내 의료산업 발전과 의료선진화를 이룰 것이며 나아가서 질병 정복에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획기적인 성과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