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 교육이 나아갈 길"

울산의대가 개교한지 20년이 지났다. 그 동안 사회 모든 분야에서 격심한 변화가 있었고 의료인들도 이에 따른 큰 풍랑을 겪고 있다. 의료계에도 수많은 난제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고 가까운 시일에 좋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어 지금의 의대생들도 이를 피해가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와중에 2004년부터 울산의대 학장직을 수행한 2년이라는 기간은 다소 짧은 감은 있지만 그래도 본인에게는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하게 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제 개교 20년을 기념하는 글을 부탁 받고 학장 임기 중 못 다한 일들, 후회스러웠던 일들에 대한 회상은 마음 뒤 편에 접어두고 대신 앞으로 울산의대의, 나아가서는 우리나라 의학교육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해 보는 것도 가치있는 일이라고 판단되어 이를 요약하고자한다.

"Half of what the faculty teaches to medical students is wrong, but the faculty does not know which half" 오래 전에 하바드 의대 학장이었던 Dr. C. Sydney Burwell이 했던 말이라고 한다. 의과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쳐야할 지식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옳다고 알려진 모든 지식을 학생들이 전부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하는 것도 물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므로 의대 교육에서는 의학의 기본 원리를 중심으로 필수 교육을 하면서 지식보다 더 중요한 인성교육과 윤리교육, 그리고 사회현상에 대한 통합적인 교육을 포함시키는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현재 우리나라 의학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상상력과 창의력을 갖춘 글로벌 인재를 키우기 어렵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는 의대 뿐 아니라 우리나라 교육 전체의 공통된 문제일 것이다. 모든 것이 시험성적 순의 서열화, 심지어는 인턴, 전공의 선발도 점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과외가 성행하는 중·고등학교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야말로 상상력, 창의력이 말살되는 교육이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특히 앞으로는 창의력이 뒷받침되지 못하고 남이 이루어 놓은 것을 따라만 해서는 절대 남을 선도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극소수 최고의 인재들이 모인 의대에서 이런 교육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고 인적자원의 낭비라는 생각조차 드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이 아닌 것 같다. 암기 잘하고 정답 잘 맞추는 붕어빵 의사들을 양산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이런 식의 교육을 받고 졸업한 후에 다시 인턴과 전공의 채용시험 역시 점수로 결정되는 것이 현실이니 이들의 고민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우려되는 상황이다. 앞으로의 의대 교육은 전문성과 창의성을 모두 겸비한 의료인을 양성해내는데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이들에게는 전문 지식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철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도록 도와서 세계를 선도하는 리더가  탄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또 하나 강조하고 싶은 것은 타인의 생명을 다루는 의료인 양성에 인성교육과 윤리교육을 좀 더 적극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해야 한다는 점이다. 몇 해 전 서울아산병원 인턴이 숙소에 더운 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자기 어머니에게 불평하니 그 어머니가 병원장에게 전화를 해서 항의했다는 이야기가 자주 회자되고 있다. 또한 어렵게 선발한 전공의들이 수련 도중 아무런 대책없이 갑자기 그만두는 일은 이제 아주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물론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반드시 의대 교육이 잘못되어서 만은 아닐 것이다. 최근에 만연하는 사회 풍조만 보아도 개인의 책임이나 의무보다는 권리만을 주장하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 그런데 남들보다 좀 더 많은 교육을 받았고 최고의 지성인으로 선택받은 의대학생이나 의사들조차도 이런 점에서 별로 예외가 아닌 것 같아서 매우 유감스럽다. 최근 의료기술의 눈부신 발달로 말미암아 의료관련 윤리문제들도 점차 복잡해지고 있으므로 이에 발맞추어 윤리교육도 변해야 한다. 임상에서의 다양한 윤리문제들은 물론이고 연구윤리도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에 맞게 달라져야 한다.

또 하나 우리나라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는 말하기와 글쓰기 실력의 부족이다. 본인이 선진국 병원에 처음 갔을 때 받은 충격은 그곳 학생과 전공의들의 발표력과 토론실력이었다. 선진국에서는 어릴 때부터 토론 문화가 발달되어있고 essay 쓰는 훈련을 강하게 받는다. “침묵은 금이다‘ 라는 우리나라의 오랜 유교전통사상으로 말미암아 말하기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단순히 알기만 해서는 경쟁력을 키울 수 없다. ”In science the credit goes to the man who convinces the world, not to the man to whom the idea first occurs. 유명한 심장의사였던 Sir William Osler(1849-1919)의 말이다. 즉 아무리 훌륭한 아이디어도 이를 먼저 생각해낸 사람 몫이 아니라 이를 실천한 후에 글로 발표한 사람 몫이라는 말이다. 작금의 의료계의 수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지 못하는 이유도 의료계가 설득력 있는 말과 글로 국민과 정부를 이해시키지 못한 것도 중요한 요인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의대 학생교육부터 발표력과 essay 실력을 향상시켜 줄 것을 부탁한다.

마지막 제안이 하나 더 있다. 의과대학 학생 때 물론 국내 의료봉사도 중요하지만 저개발 국가에 가서 하는 해외의료 봉사를 한번은 꼭 가보도록 권하고 싶다. 의사가 되려는 학생들에게 봉사정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겠지만 그 방법도 우리나라보다 훨씬 어려운 나라들의 비참한 현실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는 것도 다른 어떤 봉사활동 보다 더 값진 경험이 될 것이다. 이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수확은 global health issue를 직접 체험함으로써 미래를 바라보는 눈을 좀 더 멀리, 그리고 넓게 둘 수 있고 그럼으로써 글로벌 리더의 자질을 좀더 충실히 배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제 울산의대 졸업생들이 울산의대 뿐 아니라 국내 유수 의과대학의 교수로 진출하고 있으며 교수직이 아니더라도 다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모쪼록 앞으로도 울산의대가 격동하는 외부환경에 발 빠르게 대응함으로써 미래에는 울산의대 출신들이 우리나라 의료계에서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훌륭한 업적을 많이 이루기를 기원한다.

2009년 1월

박인숙